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8 ~ 9세기, 라벤나 상실과 불가리아 전쟁 === 8 ~ 9세기 내내 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제국은 서방지역에서도 종종 '(신성한) 공화국'[* 라틴어 'res publica'에서 영어 'republic'이 나왔고 그 일반적인 번역어가 '공화국'이기 때문에 편의상 공화국으로 썼지만, 이 '공화국'은 '군주가 없어야만 함'을 함의하는 근현대적인 용례가 아니다. res publica는 직역하면 공공의 것, 의역하면 '국가공동체' 쯤 된다. 분명히 더 깊은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국가'로 번역하면 state, country 등과 구분이 안 되고, 그렇다고 공공의 것이기 때문에 그냥 '공동체'로 번역하면 그 공동체의 종류에는 신앙공동체, 상인공동체 등도 있기 때문이다.] 등으로 높여 불리며 마치 기독교권의 [[종주국]]과 같은 대접을 받았으나,[*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11p, 원문: 'Between the sixth and eighth centuries, the Eastern Empire could still be called '''res publica''' or '''sancta res publica''' by western authors.'] 751년 [[랑고바르드족]]에 의해 [[라벤나]] 총독부가 무너지면서 교황과 서방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서유럽에서는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이 제국으로 거듭났고 카롤루스에게 제관을 씌워준 로마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참고로 8세기 후반에는 제국 대신 교황령이 '공화국'으로 지칭되었다고 한다.[*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3p, 원문: 'Then, in the later eighth century, res publica was used for the sphere of political domination that the popes tried to carve out of former Byzantine possessions.'] 800년 카롤루스의 로마 황제 대관 이후 서방에서 동로마 제국을 진짜 로마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게 된 것의 전조현상이 이미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 이슬람 [[아바스 왕조]]는 751년 중국 [[당나라]]와 전쟁을 벌일 정도로 강력해졌으며 해상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문화를 꽃피웠다. 또한 발칸 반도의 [[불가리아 제1제국]]은 성장을 거듭하여 9세기에 이르면 발칸 대부분을 석권하고 제국을 위협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한편 워낙 상징성이 강한 지역이라 제국은 로마와 이탈리아에 계속 신경을 썼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기준 서쪽 끝인 남이탈리아가 (이집트, 시리아, 카르타고 등을 상실한 이후의) 동쪽 끝인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테마 등 아나톨리아 동부 내륙보다도 더 먼데도 1071년까지 이탈리아에 영토를 계속 유지했고, [[콤니노스 왕조]] 시절에도 마누일 황제가 재진출을 시도했다.][* 배로만 가면 [[코린토스 운하]]가 한참 뒤인 1893년에야 완공된 관계로, 펠로폰네소스 남쪽 끝까지 내려가서 통째로 돌아야 하고, 불가리아를 완전히 병탄했었던 1018년~1185년을 제외하고는, 이탈리아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항구인 디라히온(디라키움)까지 [[테살로니카]]를 경유해서 거의 직선으로 뚫린 기존의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가 썩 안정적으로 확보되지 못했다.] 완전히 고대 로마적 전통이 사라지지 않았던 유스티니아누스 시절부터 동로마에 제기되던 이탈리아인들의 불만은, 쇠약해지는 제국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이라클리오스 왕조 후 문화적, 종교적 이질감이 더욱 증가했으며 동로마의 푸대접이 갈수록 더해짐에 따라 극히 심해졌다. 대표적으로 663년에 동서 분할 이후 로마를 처음 방문한 동로마 황제인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콘스탄스 2세]]의 행적을 보면 7세기 이후 동로마가 로마 시를 얼마나 푸대접하고 있었는지가 잘 드러난다. 교황 [[비탈리아노]]의 따뜻한 환영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판테온]]을 비롯한 옛 건축물들의 장식이나 청동을 떼어다가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었다.[* 아랍인과의 전비 마련이 주목적이었고, 거기에 옛 로마에 있던 모든 것이 천도와 함께 새 로마(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가야 한다는 먼 선대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빙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666년, 콘스탄스는 교황의 [[라벤나]] 대주교에 대한 간섭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황제 본인이 임명하는 총독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후로도 콘스탄스는 [[사르데냐]], 칼라브리아 등지를 순행하며 로마에서 했던 짓을 반복하였고 연공을 강요하는 등 [[정복자]]처럼 굴어 ~~원래 로마의 본토는 여긴데(...) 이제는 한낱 속주~~ [[이탈리아인]]들의 분노를 샀다. 이 시기 동로마가 이탈리아인들을 동등한 로마인으로 보지 않은 사례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수복한 유스티니아누스 때보다는 300여 년 정도 뒤에 일어났던 일이지만, 동로마군이 남이탈리아 주민(문맥상 전쟁 포로나 랑고바르드인 같은 이민족이 아닌 동로마 영역 내의 일반 주민)을 '''노예로 파는 악습'''이 있었다는 꽤 충격적인 내용도 [[영어 위키백과]]에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Nikephoros_Phokas_the_Elder|Nikephoros Phokas the Elder]]'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10세기 중반 황제 [[니키포로스 2세]]의 친조부) 문서의 내용이다. '후대 11세기의 역사학자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에 의하면, 니키포로스는 (남이탈리아에 파견된) 동로마 병사들이 귀환하면서 '''현지 [[이탈리아인]]을 약취(carry off)해서 동방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관행'''(practice: 의역하면 '[[악습]]')을 끝냄으로써 (남이탈리아) 현지 주민에 대한 학대(abuse)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이탈리아인들은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교회를 봉헌했다.' ('The 11th-century historian John Skylitzes furthermore reports that Nikephoros brought an end to abuse against the local population, by ending the practice of returning Byzantine soldiers carrying off local Italians to be sold off in the East as slaves. According to Skylitzes, the grateful Italians dedicated a church in his honour.') 악습을 끊었다는 것은 최소한 10세기에 이러한 일들이 빈번했다는 이야기가 된다(...)]이런 푸대접이 계속 차곡차곡 쌓여 후대에 로마-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동서 대분열]], [[4차 십자군]] 등이 일어나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동로마 본국 입장에서는 이탈리아 쪽이 우선순위에 있어서 다뉴브 강 및 트라키아 쪽이나, 아랍과의 최전선인 소아시아 전선에 비해서 확연히 밀렸고 그래서 신경을 덜 썼다면, 이탈리아의 입장에서는 옛 본국이면서도 이제는 콘스탄티노플의 지배를 받는 속주로 격하된 처지에서 오는 미묘한 입장과, 우선순위 면에서 항상 트라키아와 소아시아에 비해 밀리니 '이렇게 신경 안 써줄 거면 그냥 우리가 동고트 치하에 살게끔 냅두지 구태여 왜 20년간 전쟁하면서 이 땅을 초토화시키면서까지 들어왔냐?'는 불만이 [[성상 파괴 운동]]을 발화점으로 해서 폭발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귀결이 바로 중ㆍ북부 [[이탈리아]]를 포함한 로마 시 및 [[교황청]]의 동로마에서의 이탈과 [[카롤루스 왕조]]([[신성 로마 제국]])으로의 귀순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8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회복기에 접어들었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아나톨리아와 [[콘스탄티노스 5세의 불가리아 원정|불가리아에서 성공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으며, [[니키포로스 1세]]는 그리스를 완전히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존망의 위기를 넘긴 9세기에도 제국의 영토 상실은 계속되어 시칠리아, 크레타 등의 지중해의 주요한 섬들이 상실되었고, 해군력이 약화된 제국은 사리센들에게 시달렸다. 이 시기에는 서방 교회 및 서방 국가들과의 갈등, 제위 다툼이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